목사님칼럼 / 찬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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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 속에서 예수 안의 '나'를 본 적이 있는가? 그 하나로서의 '나'

그리고 그 하나에서 떨어져 나와 역사 속에 덩그러니 던져져 있는 '나'

그걸 이별이라 하나?


엄밀히 말하면 이건 이별이 아니다. 원래부터 하나였던 관계에서 단순히 물리적 거리가 멀어졌다고해서 이별이라 말할 순 없지 않는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별리가 고통스러운 건 관계의 완전한 끊어짐에서나 타당한 것이다. 사랑은 그 자체로 주체의 힘을 잃지 않았고 관계의 존속은 그래서 가능하다. 그러니 지금은 고통을 말할 때가 아니다. 왜냐하면 이건 이별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통으로 감지되는 것들은 느낌이라는 인간의 그릇된 자기인식에서다. '참'이 될 수 없는 감정은 그래서 거짓된 결과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그것이 고통으로 아픔으로 상실로 경험되어질 뿐이다.


그런데 고통은 실제적으로 내게 느껴지기도 한다. 찰나같이 주어진 지극한 사랑의 시간들은 지나가고 긴 이별이 앞에 놓였다. 상황적 분리는 계속해서 고통을 감지하라고 내게 지시한다. 실제로 그 통증은 수시로 나를 잠식한다. 헤어나지 못하고 아파하고 불안해한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육의 감각과는 무관한 무엇이 점점 선명하게 자각된다. 생명력을 잃지 않는 사랑의 열심이 만들어내는 믿음이다. 심기워져 내 안에 살고 있는 이 이중성은 삶의 전반에 깔려있다. 사랑과 이별과 생명과 연합은 한데 섞여 나라는 인간의 실존을 매일 바라보게 한다. 그저 그렇게 보이다 사라지는 것이 아닐 텐데...무얼을 알고 배우라는 건가?


사랑을 아는가? 사랑이 자라나고 깊어진다는 것은 함께하는 시간의 공유로 측정되는 것 아니다. '그가 거기 있는 것을 아는 것'이 내게 있어 사랑이다. 안다는 것은 관계성이다. 신적 연합에서만 가능한 일이지만 우리가 체감하는 인간의 사랑에서도 더러 허락되어 배워지는 감정이다. 인생을 시간 안에 가두시고 배우라고 주신 것 중 하나다. 두 손 마주 잡고 나 너 좋아 너 나 좋아 소꿉놀이는 소멸되어질 인간의 한계를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사실 전심으로 나는 그런 것을 원하고 있다. 그 절절함의 감정에 어떤 헛됨이 있을 수 있다 여기겠는가? 하지만 절실할 수록 더 다가오는 또 다른 간섭의 손길은 내가 느끼고 원하는 감정이라는 것들의 실체를 발겨 내신다. 정말 내가 감지하는 이 모든 것들이 참이기도 하고 거짓이기도 한 건가? 고통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참 고통은 참 사랑의 깨어짐에서나 허락되는 감정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토해낸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의 외침이 바로 그 자리에서 나온 것이다. 완전했던 연합이 죄의 속량을 위해 완전한 헤어짐을 먼저 낳는다. 하늘과 땅의 거리로, 성육신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이땅에 오신 예수님이지만 그건 이별의 모습이 아니었다. 인간의 측은지심이 하늘에까지 닿아 神을 위로하려 들었을 뿐 성자는 성부와의 연합이 깨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공의는 역사 속 예수의 모습에서 순종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시간이라는 한시적 안목 속에서 떨어짐의 모습으로 보여질 뿐 연합의 관계에서만 가능한 화평이요 청결이었다. 그런데 그 관계가 깨어진 단 한 순간이 십자가 위에서 일어났다. 거기에만 참 고통이 존재한다. 그러니 섣부르게 아픔을 고통을 말하지 말자.


그리고 부활로 인한 연합이 선포된다. 살아남이다. 극심한 통증을 딛고 생명이 탄생되는 자리다. 여자가 죽고 아이가 탄생하는 자리다. 십자가로 완성되는 구원의 현장이다. 그 자리에 불립받은 우리는 이제 원래 하나였던 관계의 기억을 끌어낼 수 있다. 신부에게 부케가 주어진 것이다. 결혼식장에서 많은 어여쁜 자들 중에 부케를 들고 있는 자가 신부다. 신랑의 빙폐물인 믿음이 우리에겐 부케다. 하지만 신부된 우리는 지금 신랑과 가시적으론 이별의 상태다. 그 신랑이 지금 어디 있는가? 난 어디를 바라보며 살고 있는가? 정말 그 기억만으로 이별로 감지되는 지금의 상황에서 내 육이 자꾸 요구하는 별리의 아픔을 밀어낼 수 있는가?


신랑의 입맞춤은 달콤했고 구원의 감격으로 우리에게 기억된다. 그 순간의 기억이 영원을 보장한다. 그렇게 내 안에 믿음으로 생명으로 들어와 있는 예수는 2000년 전 십자가가 꽃히던 그 시간에 역사적 사건으로 이루어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그 이전, 시간의 개념도 없던 묵시 속에서 이미 완성된 자로 존재했었다. 원래도 거기였던 내 자리가 이젠 정말 선명하게 자각되는 것이다. 그러니 사랑으로 치면 이보다 더한 역사가 어디 있으며 그 본질적 깊음과 완전함이 이보다 완벽할 수 있는가? 그런데 우린 지금 외롭다. 신랑과의 완전한 연합이 이루어져 있지 않아서다. 이 역사 속에서 배우고 오라는 것이 있다 했다.


신기한 건 이 지독한 외로움 속에서 날마다 생겨나는 믿음과 사랑을 느끼는 것이다. 함께 할 때 느끼지 못했던 신뢰와 사랑이 이별의 모습에서 더욱 선명히 발견된다. 아니 함께할 떈 전심이 그 속에 묻혀 객관적인 감정으로 바라보지 못했을 것이다. 이제 떨어짐의 사건으로 그 실체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뿐이다. 역사 속으로 던져진 성도의 운명에서 체험되는 단 한가지 믿음으로 인함이다. 믿음이 주체이고 또한 객체가 되어 나를 장악하고 나에게 보이고 그러는 것이다. 그것을 배우기 위해 살아야야하는 인생에서 한시적으로 보여지는 모습들이라면 그 불완전함이 오히려 위로가 된다. 그래서 살 수 있다. 믿음이 이기는 것이다. 그러니 이건 이별이 아니다. 우린 연합의 상태고 이미 완전하다. 그 사랑만이 참 이다. 내가 지금 슬프지 않고 기다리며 바랄 수 있는 근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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